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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구천(九天)에 사무치는 그의 생명(生命)의 노래만은 구원(久遠)히 빛나리라(한하운 시초 박거영 서문 中)

한하운과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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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과 부평

한하운이 부평 땅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는 1949년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성계원의 위치를 표시하는 이정표

성계원의 위치를 표시하는 이정표

“나는 그들을 설득시키고 수원시의 알선으로 서력 1949년 12월 30일 밤 8시에 70명의 환자를 인솔하고 부평으로 갔다. 나는 기뻤다. 그렇게도 원하였던 땅을 얻게 된 까닭으로…… (중략) 나는 600명 환자의 선거에 의하여 이곳 자치위원장에 취임하고 원명을 성계원이라 명명하였다. 도리지하 자성계(桃李之下 自成蹊) 이라는 뜻에서 성계란 이름을 얻었다.”

부평농장

부평농장 일대(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정부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진료시스템 혹은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보호시설조차 마련할 여력이 없었으며 의학기술 역시 명쾌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만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정부는 1949년 9월 한센인이 거주할 수 있는 건물을 부평에 세우고 수원과 춘천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센인들을 부평으로 이주시켰다.

이 때 한센인의 대표로 정부와 교섭을 한 이가 한하운이었다.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운 성계원은 인천가족공원 입구를 지나 간석사거리로 넘어가는 길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월산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이곳의 지형은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청천농장에 위치한 청농교회

청천농장에 위치한 청농교회

이리농림학교에서 수의축산학을 전공한 한하운은 전공 지식을 발판 삼아 이곳에서 양돈과 양계사업을 적극 펼쳤다. 이전의 한센인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걸과 걸식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인천에서 유통되는 계란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미약하나마 한센인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이름을 고친 성계원은 1968년 익산과 칠곡, 부평 등에 분산되어 있는 나병원을 소록도 병원에 통합코자 한 정부 정책에 따라 폐원되었다. 이후 이곳은 부평농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하운이 한센인의 자활과 복지를 위해 힘쓴 흔적은 이 외에도 부평의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성계원에서 음성판정을 받은 한센인들은 ‘십정농장’과 ‘청천농장’으로 이주하였는데 기독교인은 ‘청천농장’에 천주교인은 ‘십정농장’에 주로 머물렀다. 한하운 역시 1959년 완치판정을 받은 후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십정농장’에 거주하였다.
한하운은 한센인의 자립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1952년에는 한센인 2세들의 복지시설인 ‘신명보육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자리하면서 그들이 공교육의 담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당시 냉혹한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각 학교의 교직원들과 학부모들은 한센인 2세들의 입학을 반대하였는데, 한하운은 오랜 시간동안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였다. 비록 먼 길을 돌아가야 했지만 부평서초등학교에 전 학년을 입학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센인의 복지를 위한 사회활동가 이전에 그는 시인이었다.
부평에 정착한 이후에도 활발한 시작(詩作)활동을 하였는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보리피리」 와 자서전인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를 부평에서 썼다.
한센병 완치 판정을 받은 뒤에는 서울 명동에 무하문화사를 설립하여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을 비롯하여 「정본 한하운 시집」을 간행하는 등 문학인으로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센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시인은 안타깝게도 완치 판정을 받은 지 20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1975년 십정동 자택에서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였다.
소외자의 삶을 살았던 시인은 마지막조차 지독히 쓸쓸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큰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75년 3월 14일,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가 실린다.

문단은 금년 들어 원로문인들이 잇달아 타계하는 슬픈일을 겪었는데 정작 이들의 빈소나 장례식장엔 극소수의 문인들만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해서 최근 일부 문인들 사이엔 “너무 비정하다”“인정머리 없는 문인사회다”라고 자가비판. <중략> 지난 2월 28일 인천에서 작고한 시인 한하운씨의 빈소에는 서울에선 누가 조의를 표하러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하운이 부평에 온 후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끼친 영향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평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간신히 ‘부평농장’을 비롯한 당시의 이름만이 몇 몇 남아 점점 사라져가는 그의 그림자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

이북이 고향인 그에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부평은 실질적인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그는 죽어서도 부평 땅에 묻히지 못했다.
은둔의 삶을 살기 위해 부평을 찾았던 것처럼
그는 죽어서도 은둔자로 남아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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